'징비록' 속 일본,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연예공감]

성선해 기자 입력 2015. 3. 29. 10:11 수정 2015. 3. 2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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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티브이데일리 성선해 기자] KBS1 대하드라마 '징비록'(극본 정형수ㆍ연출 김상휘) 속에는 유독 임진왜란의 주범이었던 아즈치 모모야마(安土 桃山) 시대 일본 장수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김규철), 고니시 유키나가(이광기), 가토 기요마사(이정용) 등의 분량은 주인공인 류성룡(김상중)과 선조(김태우) 못지않다.

이는 기존 임진왜란을 그린 사극, 특히 같은 시대를 다룬 KBS1 '불멸의 이순신'과 차별성을 두기 위함이다. '불멸의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바다 위의 상황을 다뤘다면,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단순히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이 아닌, 조선-일본-명나라 내외부의 정치적-외교적 분쟁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대하사극은 교양과 재미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철저한 고증이 기본이다. 그렇다면 '징비록' 속 등장한 일본 장수 3인방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豊臣秀吉, 1536 ~ 1598)

'징비록'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앞니가 툭 튀어나와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진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앞니는 '뻐드렁니'였을까.

1591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성일은 그의 외모를 "원숭이상에 눈매가 쥐와 같다"고 묘사한 바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활동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저서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서 "왜소한 체격에 못생겼다"라고 적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그를 '원숭이' 혹은 '대머리 쥐'라고 부르기도 했다. 즉 '징비록' 속 그의 뻐드렁니는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징비록' 7회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통일은 오다 노부나가가 8할을 이룬 것이니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라며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전국 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를 연 무장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 히데요시는 그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모반을 막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으며,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확립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처럼 일본 전국 통일의 8할은 그의 손에서 이뤄진 셈이다.

결국 그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 아시아 제국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야심을 채우고, 내란 중 강성해진 무장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 小西行長, 1558 ~ 1600)

'징비록' 12회에서는 일본의 대군이 조선을 향해 대규모의 군선을 이끌고 출항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선봉장은 놀랍게도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그간 그는 사위인 대마도주와 힘을 합해 전쟁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주로 보였기 때문에 이는 반전에 가까웠다.

실제 역사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과의 교섭에 부던히 애를 썼으나, 선조가 자신의 뜻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임진왜란에 참전한다. "믿지 못한다면 보여줄 것이다"라며 출전을 결심했던 '징비록' 속 고니시의 말에는 이러한 맥락이 함축적으로 들어있다.

그는 일본군의 선봉장으로 나서 1만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1진으로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파죽지세로 대동강까지 진격한 그는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오기도 했다.

'징비록'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기리시탄(吉利支丹) 신자라는 점이 언급된 적이 있다. 기리시탄은 막부시대 일본의 크리스천 즉, 로마 카톨릭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독실한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으며, 그의 영지에 살던 상당수의 주민 역시 그러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 위해 군기로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으며, 종군 신부의 자격으로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를 조선에 초청하기도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십자가는 임진왜란을 다룬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 加藤淸正, 1562 ~ 1611)

고니시 유키나가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다. '징비록' 13화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에서 공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에 "어서 출정한다고 해라"라며 다급해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일본군의 조선 출병이 정해지자마자 자신이 선봉장을 맡겠다고 나섰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에 의해 좌절됐다.

실제로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평생의 숙적이었다. 다혈질이고 저돌적인 성격의 가토 기요마사와 전략가에 계산적인 성향이 강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끊임없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능가하는 공을 세우려고 했다고 전해진다.

또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는 일본에 귀국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반대세력을 격파해, 도쿠가와가 정권을 잡는 데 기여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지막까지 숙적이었다.

'징비록'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단순 무식한 다혈질의 무장으로 그려진다. 이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명과 일본의 화의 교섭에 반대하며 전쟁을 계속하자는 강경 주장을 펼쳤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호랑이 잡는 가토'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에서 호랑이 사냥을 즐겼고, 그 가죽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하곤 했다. 이는 조선 백성에게 그의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또한 가토 기요마사는 축성술의 귀재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침략 거점 확보를 위해 나고야성을 건설했다. 여기에는 가토 기요마사도 참여했다. 축성술에 능했던 그는 임진왜란 당시 울산에서 지구전을 위해 서생포왜성을 지어 명과 조선군을 상대로 장기전을 벌이기도 했다. 단순 무식한 무장이라기보다, 전쟁에 최적화된 장수였던 셈이다.

[티브이데일리 성선해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KBS, KBS1 방송화면 캡처]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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