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아역 아닌 제 또래 고민을 연기할 때 빛나는 진지희

2015. 1.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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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요즘 티브이엔 10대가 없지 않아요?” 한 매체의 초청으로 나간 신년맞이 대중문화 좌담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대담 참석자가 운을 뗐다. 가만, 무슨 소리지?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을 도배하고 있는 게 온통 10대들이고, 요즘 들어 10대 아역 배우들의 위상은 더 높아지지 않았나 말이다. 반문을 하려던 찰나 상대가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티브이에 10대들의 이야기가 있을 자리가 있었잖아요. 문화방송(MBC) <사춘기>(1993~1996)나 <나>(1996), 한국방송(KBS) <학교>(1999~2002, 2012~2013) 시리즈 같은 작품들. 당대의 10대들이 무슨 고민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 자리가 사라진 것 같아요. 에스비에스(SBS) <상속자들>(2013) 보세요. 그게 어디 고등학생 이야기인가요? 재벌 3세가 등장하는 신데렐라 로맨스를 무대만 고등학교로 바꾼 거죠. 티브이 안에는 하이틴들이 보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더라고요.”

동의하자니 지난 몇년간 등장했던 일련의 학원물들이 떠올랐다. 한국방송 <정글피쉬> 시리즈(2008, 2010)나 <공부의 신>(2010>, 드라마 스페셜 <화이트 크리스마스>(2011)나 <학교 2013>(2012~2013) 같은 작품들은 분명 준수한 작품들이었다. 문화방송 <여왕의 교실>(2013) 또한 연기파 10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 작품들에 10대로 출연한 배우 중 절반가량은 촬영 당시 이미 20대였다는 사실과, 그 리스트도 2013년 어귀에 그쳤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10대들은 어른들의 세상에 편입되려 노력하는 특별한 소수이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10대 아역들은 대개 드라마에서는 성인 연기자들의 아역을 연기하고 쇼 프로그램에선 걸그룹 섹시댄스를 추며 어른의 욕망을 대리한다. 그래, 10대들의 이야기가 한동안 뜸하긴 했네. 좌담 상대의 설명은 계속됐다. “그래서 요즘 10대들이 뭘 보나 연구해봤는데, 티브이를 아예 안 보는 학생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으니까요. 오히려 또래 비제이(BJ)들이 운영하는 인터넷방송을 본다고 답한 학생들이 더 많았어요.” 정말 그런 걸까. 초등학생 때 <사춘기>를, 고등학생 때 <학교>를 보며 자란 나는 다소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좌담을 마쳤다.

좌담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문득 내가 제이티비시(JTBC) <선암여고 탐정단>(2014~)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화방송과 제이티비시를 차례로 예능왕국으로 만든 여운혁 감독의 첫 드라마 연출작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지만, 좌담에서 제기된 고민에 대한 답으로 그만한 작품도 없었다. 10대들이 주인공의 어린 시절이나 주인공의 자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인공인 작품, 그리고 무대만 고등학교인 신데렐라 재벌 로맨스가 아니라 입시 스트레스, 왕따, 자살, 낙태 등 당대의 10대들이 부딪힐 만한 이슈와 고민들이 줄거리의 뼈대를 이루는 준수한 학원물. 여자고등학교에서 탐정단을 자처하는 다섯 여고생이 각종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 작품을 난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올해로 열일곱이 된 진지희(사진)가 열일곱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작품이 아닌가.

돌이켜보면 진지희는 참 비범한 방식으로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그를 스타덤에 올린 작품인 문화방송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 진지희는 안하무인에 독설을 일삼는 가족의 막내 해리 역을 맡았다. 해리는 어린 소녀가 연기하기엔 다소 벅차 보이는 캐릭터였는데, 어지간한 막장 드라마의 악역만큼이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소악마였기 때문이다. 집에 빌붙어 살게 된 식모 세경(신세경)과 신애(서신애)를 노골적으로 괄시하고, 세상을 ‘친구’와 ‘빵꾸똥꾸’의 이분법적 피아 구분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반장 선거에서 낙선하자 반 친구들을 폭행하려 달려드는 이 불세출의 악역. 김병욱 감독이 창조한 세계에서 해리와 비견할 만한 인물은 에스비에스 <순풍 산부인과>(1999)의 전설적인 괴물 미달이 정도가 근접할 뿐, 아예 대놓고 눈 밑에 점을 찍고 등장하며 막장 드라마를 패러디하는 해리는 전인미답의 캐릭터였다.

무책임한 어른들 사이
괴물로 자란 ‘빵꾸똥꾸’ 해리처럼
어른들 학대를 피해
상상의 세계로 도망간 ‘정순’처럼
나잇값 못하는 가족들에
몸서리치는 ‘민경’처럼
‘선암여고 탐정단’ 채율도
발랄함 속 진지를 잃지 않는다

물론 해리가 마냥 괴물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에피소드 중심의 구성이었던 <순풍 산부인과>와는 달리 <지붕 뚫고 하이킥>은 전체 스토리 중심의 구성이었고, 그 덕에 해리는 미달이가 미처 가지지 못했던 성장담을 가질 수 있었다. 무능력한 아빠(정보석)와 성적으로 자신을 닦달하기만 하는 엄마(오현경) 사이에서 의지할 곳을 잃은 채 인성이 망가진 해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패악을 받아주고 챙겨주는 세경과 함께 어울려주는 또래친구 신애를 만나 성장한다. 괴물처럼 보였던 해리에게는 무책임한 어른들의 방기라는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었던 셈이다. 작품 초반엔 악역으로 출발했다가 끝에 가선 친구를 잃고 슬퍼하는 애잔한 소녀가 되어야 하는 이 기묘한 성장담을 진지희는 정확하게 연기해냈다. 그의 나이 열한살의 일이었다.

제이티비시 <인수대비>(2012)의 폐비 윤씨 아역이나 문화방송 <해를 품은 달>(2012)의 민화공주 아역 등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진지희의 필모그래피에 굵직한 글씨로 기록된 작품들은 대체로 또래가 경험할 법한 어둠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마치 무책임한 어른들 사이에서 괴물로 커버린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해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들의 학대를 피해 상상의 세계로 도망간 <헨젤과 그레텔>(2007)의 정순이 그랬으며, 나잇값 못하는 가족들에 몸서리치는 <고령화 가족>(2013) 속 질풍노도의 10대 민경이 그렇다. 어른들을 공포로 몰아가는 불가해한 아이, 담배를 태우고 가출을 하는 불량청소년, 하지만 미워하자니 안쓰럽고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소녀. 또래 배우인 김새론이 <여행자>(2009)와 <아저씨>(2010), <바비>(2011)와 <도희야>(2014)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입양, 인신매매, 불법 장기거래, 가정폭력과 같은 극단의 고통을 연기하는 동안, 진지희는 또래들이 보다 더 쉽게 접할 만한 보편적인 고민을 연기해온 셈이다.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진지희가 맡은 채율 또한 그런 인물이다. 아빠(최덕문)는 가정에 무신경하고, 세간에는 천재 아들을 키워낸 슈퍼맘으로 소문난 엄마(이승연)는 사실 그럴싸한 간판과 학벌을 중시하는 통제광이다. 외고 입시에 실패했으니 학업 수준이 낮은 선암여고로 전학해 전교 1등을 확보하고, 1년 뒤 미국으로 유학. 엄마가 멋대로 짜놓은 미래에 맞춰 입시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채율에게 이 세상은 꼭 벌칙 같다. 그런 채율의 눈에 ‘탐정단’을 자처하며 등굣길 변태를 잡겠다고 날뛰는 동급생들은 한심하게만 보이지만, 어느새 채율 또한 입시 레이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 눈앞에 열중할 무언가에 전부를 바치는 ‘탐정단’의 열정에 전염된다. 염세적이고 냉소적이던 채율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살아 숨쉬는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진지희는 전에 없던 진지하고 시니컬한 톤으로 연기한다.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의 동명의 원작소설과는 달리 드라마판 <선암여고 탐정단>은 시종일관 가볍고 발랄한 톤을 잃지 않는다. 예능에서나 쓰일 법한 자막이나 컴퓨터 그래픽, 각종 효과음들이 장면 곳곳을 채우고, 중간중간 삽입되는 채율의 인터뷰는 마치 문화방송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나 나올 법한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자신들이 다루는 소재의 무게마저 가벼이 여기지는 않는다. 왕따에 시달려 자살 시도를 하는 소녀, 돈을 받고 시험 답안지를 빼돌리는 교장, 재임용을 걱정해 뇌물을 건네야 하는 계약직 교사,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은 입시 스트레스. <선암여고 탐정단>은 이런 당대 고등학교의 어둠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시트콤을 연상시키는 작법에도 이 작품이 응당 갖춰야 할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작품 한가운데에서 정극 연기로 극의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진지희의 공일 것이다. 누군가의 아역을 연기할 때가 아니라, 또래가 겪을 법한 보편적인 고민을 연기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배우가 지닌 힘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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