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배설 장군을 옹호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듀나 입력 2014. 10. 1. 16:10 수정 2014. 10. 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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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배설 장군 왜곡논란이 씁쓸한 진짜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얼마 전에 개봉한 호러영화 <콰이어트 원>에는 '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음'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숙련된 호러영화팬이라면 여기에 티끌만큼의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드크레디트가 올라가면 실존인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사진이 나오는데, 역시 대충 무시했을 것이다. 일단 실존인물치고는 다들 지나치게 잘 생겼으니까.

영화를 본 다음에 검색을 해본다. <콰이어트 원>이 아이디어를 얻은 실화는 1970년대에 캐나다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재하지 않은 사람의 유령을 강령술로 불러온 실험이다. '필립 실험'이라는 이 사건은 이 분야에 막연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건이 '필립 실험'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달랐으니, '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음'이란 그냥 허풍이었던 거다.

이야기꾼에게 실화란 이런 것이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재료이고 그 다음에도 이야기의 재료다. 그 '실화'에서 좋은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면 이야기꾼은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를 멈추려면 그의 두뇌에서 이야기꾼이 아닌 다른 인격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콰이어트 원>은 기껏해야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하지만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들은 어떻게 될까? 역사소설일 경우 역사에 대한 상세한 지식과 정확한 시대 묘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실화나 실존인물에 바탕을 둔 위대한 문학이나 영화 중 이에 신경 쓰는 작품은 의외로 적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셰익스피어를 보라. <맥베스>, <헨리 5세>,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다들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들을 갖고 역사를 배우려하면 곤란하다.

영화의 경우, 대부분 숙련된 관객들은 이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니까 영화가 끝나면 얼마든지 실제 사건에 대한 검색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사이트들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곳.(http://www.historyvshollywood.com)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이트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변호인>이나 <제보자>처럼 실화에 영감을 받은 영화들이 실화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곳이 따로 있으면 편리하지 않을까.

자, 이제 <명량>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를 본 관객들은 대부분 검색을 했을 것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은 예습을 했을 것이고, 역사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둘 다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그리는 사건들이 실화 그대로라고 믿는 관객들이 얼마나 될까? 이순신 장군님을 구하기 위해 기계장치의 신처럼 나타나 판옥선을 끄는 백성들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올까.

슬슬 배설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다. 15일, 경주배씨 비상대책위원회는 경북 성주경찰서에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명량 제작자 겸 감독 김한민, 각본가 전철홍, 소설가 김호경을 고소했고, 23일엔 경주배씨 대종회는 CJ엔터테인먼트를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로 결정했다. 29일엔 '김한민 감독의 시대정신과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명량>이 사실을 왜곡해 배설 장군을 비겁자로 그렸다는 것이 이유다.

이건 좀 이상한 소동이다. 이유를 이해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영화 속 배설은 역사에 기록된 배설과는 많이 다른 행동을 하고 그것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거북선에 불을 지르고, 이순신을 암살하려 시도하고, 마지막엔 달아나다가 활에 맞아 죽는다. 모두 허구이다. 이들 중 앞의 둘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고 마지막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활에 맞아 죽는 대신 달아났다가 2년 뒤에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하지만 후손들이 사자 명예훼손으로 제작자와 감독을 고소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 영화 속 배설을 지우고 역사 속 배설을 넣는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후손측은 배설이 누명을 썼으며 참수 6년 후에 명예회복에 되었다는 이야기를 밀고 있지만 이는 그렇게 강한 반박은 못 된다. 명예회복이란 늘 당시 정치적 사정과 엮여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설은 흐릿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역사에 기록된 게 많지 않고 그 역시 그리 긍정적이기만 하지는 못하다. 이런 영화를 만들 때 1차 소스가 되는 <난중일기>의 기록만 봐도 배설에 대한 기록은 부정적이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아도 기껏해야 엄청난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의 진실을 알고 그것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의 명예회복에 나서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만 이게 과연 그런 상황일까. 만약 내세가 있고 배설이 이 소동을 보고 있다면 그는 제발 후손들이 포기하길 빌 것이다. 어차피 후손들이 조용히 있었다면 영화가 내려감과 동시에 잊혔을 이름이다. 아니, 벌써 잊혔을지도 모른다.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위해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괴상한 일이다. 아직도 사회적,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친일파 자손과는 달리, 이들과 배설 사이의 연결은 거의 무의미하다. 유전적 연결성은 무시해도 좋다. 그들이 부계직계 후손이고 동성동본 금혼을 지켰다면 오히려 유전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연관 관계가 더 흐릿할 가능성이 높다. 동성동본 금혼은 물려 받는 부계 유전자를 묽게 하는 펌프와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려 받은 성과 족보뿐이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수백 년 전에 죽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 대한 묘사에 분노하고 가장 긍정적인 가설을 옹호하며 이를 위해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더 괴상한 것은 우리나라의 법이 형식적으로나마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소송은 대부분 후손들에게 불리하게 끝났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가 근대국가를 시작하긴 했는지 의심하게 될 정도는 된다.

배설의 후손들이 예로 들었던, "친구들이 배설 후손이라고 놀려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한 조카 아들" 생각이 자꾸 난다. 설마 그 아이들이 배씨 성 아이가 경주배씨인 걸 알고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경주배씨인 아이가 <명량> 때문에 놀림감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넌 수백 년 전에 죽은 누구누구의 후손"이 당연한 욕이 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회는 "네 할아버지는 노비"라는 욕이 통하는 곳과 같은 곳이다. 그리고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오는 부계혈통이라는 비과학적인 판타지야 말로 이런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배설 왜곡을 둘러싼 이 소동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외부필자의 칼럼은 DAUM 연예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진=영화 <명량>스틸컷, YTN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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