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이 아는 '제보자'의 결말, 더 씁쓸한 이유

2014. 9.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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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문화'랑'] 영화

2005년 '황우석 스캔들' 바탕 '제보자''피디수첩' 제작진이 겪은 실화 그려임순례식 유머로 영화 흡인력 제고박해일·이경영·유연석 출연진 탄탄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진실이다.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애국은 거부한다."(언론인 고 리영희)

"진실과 국익 중에 어느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진실"이라고 쉽게 답할 것이다. 그러나 국익(또는 조직의 이익) 대신 진실을 좇아 밝히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는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내부 비리를 폭로한 대부분의 제보자들이 갖은 협박과 실직,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실만 봐도 이 질문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영화 <제보자>(10월2일 개봉)는 2005년 '줄기세포 논문 조작 논란'으로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황우석 스캔들'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사건 그 자체보다는 진실을 추적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는다. 영화는 극적 재미를 위한 몇가지 설정을 빼고는 대부분 당시 이 사건을 최초로 폭로했던 문화방송(MBC) 한학수 피디를 비롯한 <피디수첩> 제작진의 실화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엔비에스 방송국 '피디추적'의 윤민철(박해일) 피디는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한 이장환 박사(이경영)의 연구 결과가 조작됐다는 심민호(유연석)의 제보를 받고 진실 추적에 나선다. 취재를 할수록 민호의 제보가 사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민철. 하지만 이미 '애국'이라는 껍데기에 눈이 가려진 방송사 간부들은 "진실은 중요치 않다. 국민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방송 불가를 천명하고, 같은 팀의 동료들마저도 "줄기세포가 설마 하나도 없겠느냐"며 취재를 중단하자고 한다. 심지어 제보자 민호의 아내이자 연구팀 일원인 미현(류현경) 역시 "줄기세포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면서도 남편과 자신, 아픈 아이에게 닥칠 불행을 생각하며 진실에 눈감는다. 여기에 일반 시민들마저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박사님을 믿는다"며 연일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피디추적'에 항의전화를 건다.

현실에서 '줄기세포 논문 조작 논란'에 대한 법의 심판이 내려진 상태다. 당연히 영화의 결말도 정해져 있다. 더욱이 '테라토마'(양성종양), '스키드 마우스'(면역력을 없앤 실험용 쥐) 등 각종 과학용어까지 난무한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어서 관객들의 기본 이해도가 높은데다, 중간중간 삽입된 임순례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도 흡인력을 발휘한다. 실화의 힘을 적절히 이용한 덕분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사건의 실체를 더 알고 싶어지는 관객들이라면 한학수 피디가 쓴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개정판은 <진실, 그것을 믿었다>)를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능숙한 언론플레이를 벌이는 이경영, 사건의 진실과 제보자 보호라는 두가지 명분을 모두 지키기 위해 고뇌하는 박해일, 의사로서의 양심을 걸고 비리에 저항하는 유연석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다. 단, <도가니>, <변호인> 등 흥행에 성공한 실화 영화들처럼 관객의 '공분'을 이끌어 내다 결국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한 방'이 이 영화에서는 조금 약해 아쉽다.

만듦새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지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실을 추척하는 영화 속 프로그램 명칭은 문화방송 <피디수첩>과 한국방송 <추적60분>을 섞어 놓은 이름이다. 이런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위력을 떨치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지난 7월 1000회를 맞은 <피디수첩>은 이제 '언론탄압'의 상징이 돼 버렸다. 황우석 사건을 비롯해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 검찰 향응·성접대 문제,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등을 고발해 사회적 공론화에 큰 기여를 한 프로그램의 명성은 온데간데없다. 영화와 같은 정의롭지 못한 현실은 여전히 진행형인데, 그것을 추적하고 고발하는 언론은 몰락한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내가 초점을 둔 것은 언론의 자유, 우리 사회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한 언론인의 집요한 투쟁이었다"며 "이 영화는 거짓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희생하고 애쓰는 분들에 대한 헌사"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이 영화는 '헌사'가 아니라 언론과 우리 사회에 던지는 '준엄한 꾸짖음'에 가깝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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