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마트에 줄서기, 미국인의 삶은 지금 최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2012. 1. 2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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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 인근 소도시 아파트 단지의 공동 세탁장에는 빵이 수북이 쌓여 있다. 인근 대형마트에서 유효기간이 임박한 식품을 시민단체가 수거해 이곳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세탁장에 빵을 놓아두는 것은 이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창피해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다. 시민단체 '푸드헬프' 관계자는 "이렇게 빵을 가져다 놓지 않으면 굶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매일 갖다 놓아도 빵이 금세 없어진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최근 중산층에서 빈민으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라 공개적으로 빵을 가져가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공동 세탁장에 빵을 놓아두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인 8명 중 1명꼴로 비상식량을 지원받고 있다. 이 중 1730만명은 주기적으로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5명 중 1명이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며, 장기실업자는 이미 880만명을 넘어섰다. 미국이 이제 '빈곤 대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인구조사국(Census Bureau)에 따르면 미국의 빈곤선은 2010년 4인 가족 기준으로 연 소득 2만4323달러(약 2820만원). 이보다 소득이 낮으면 빈곤 계층으로 분류된다.

ⓒFlickr 미국 전역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배달하는 푸드 뱅크 활동가들이 차량에 음식을 싣고 있다.

공동 세탁장에서 매일 빵을 가져간다는 래리 스미스 씨(49)는 "무료 빵과 식품이 생활비를 아끼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주는 푸드 스탬프(정부 생계보조 식권)로 600여 달러(약 70만원)를 받지만 23세·15세인 두 아들과 아내, 이렇게 네 식구가 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는 2007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결국 살던 집을 차압당하고 지난해 방 두 개인 이 아파트로 이사했다. 원래 자동차 정비사였지만 지금은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어 한 달에 겨우 1500달러도 벌기 힘든 상황이다. 아파트 집세 950달러를 낸 나머지와 정부 지원으로 받는 푸드 스탬프가 생활비로 쓸 수 있는 전부다.

환상이 깨진 중산층들

스미스 씨는 "나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집을 차압당하고 나서 우리가 얼마나 환상에 젖어 살아왔는지 알게 됐다. 지금 마트에서 무언가 살 때는 아주 신중해진다. 우리는 스스로를 빈곤층이라 생각한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는 고등학교를 나오면 그래도 먹고살 정도의 일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일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려면 우리 아들을 보면 된다." 큰아들 엘리엇은 고등학교를 나온 뒤 아버지를 따라 자동차 정비 일을 배웠지만 그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최근 악화된 경기로 일자리가 많이 줄어든 데다 일을 하려는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번번이 취업이 좌절되고 있다.

스미스 씨 가족은 모두 매월 1일을 기다린다. 정부에서 주는 푸드 스탬프 식량 카드가 1일 자정에 충전되기 때문이다. 매달 마지막 날 밤 11시가 넘으면 가족 모두 차를 타고 인근 대형마트로 향한다. 마트에 도착한 그들은 각각 흩어졌다. 그리고 각자 맡은 섹션에서 밀가루·달걀·우유·빵 등 기본 식량을 바구니에 담았다. 밤 12시 정각이 되자 가족 모두 계산대로 달려가 줄을 섰다. 계산대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줄을 서 있다. 모두 이날만을 기다린 빈곤층 가족들이다.

매달 1일 자정마다 벌어지는 이런 진풍경을 피해 스미스 씨 가족은 가능하면 서둘러 온 가족이 쇼핑에 나선다. 4명이 한꺼번에 줄을 서면 그만큼 계산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이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비닐봉지를 들고 마트를 나선 래리 스미스 씨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 시간에 몰려드는 것을 보면서 지금의 경제위기를 온몸으로 느낀다. 혼잡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장으로서 걱정이 크다"라고 말했다.

ⓒReuter=Newsis 로스앤젤레스 외곽에 있는 천막촌에서 노숙인이 샤워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정부로부터 생계 보조를 받는 미국인은 4450만명. 역대 최고 기록이다. 미국인 중 14.6%가 스미스 씨처럼 정부의 보조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2007년 말, 금융위기가 미국에 닥치기 시작했을 때 정부로부터 생계 보조를 받는 사람은 2600만여 명이었으나 3년6개월 만에 1800만명이 추가되면서 거의 70% 가까이 증가했다. 이 수치가 계속 늘어간다는 것은 미국 경기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인 64% 현금 1000달러도 없어

정부 보조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연소득 2만5000달러 이상 계층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들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것을 포기했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메리 헨킨스 씨(32)는 "5년 전만 해도 정부는 소비를 장려했다. 집집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신용카드를 한도껏 사용해 차 두세 대를 굴리고 2층집을 소유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시작되며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빚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미국 전국크레딧카운슬링협회(NFCC)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4%가 비상시에 대비한 현금을 1000달러(약 116만원)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NFCC 대변인은 "미국 소비자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저축할 돈은커녕 위급한 상황에 사용할 예비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만약 당신이 위급하게 1000달러가 필요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응답자 가운데 17%가 "신용카드 대금이나 주택대출 상환금을 내지 않고 그 돈으로 사용하겠다"라고 대답했다. 12%는 가진 물건을 팔거나 전당포에서 돈을 마련할 것, 17%는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빌릴 것이라고 대답했다.

워싱턴 주 타코마에 있는 한 전당포는 이런 상황에 처한 서민이 맡긴 물건으로 가득했다. 차는 물론이고 결혼반지나 훈장들도 있었다. 전당포 주인인 마리오 씨는 "여기 맡긴 물건을 다시 찾아가는 경우는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이 중고로 처리해야 하는데 최근 물량이 부쩍 늘었다. 우리 전당포는 주로 극빈층이 이용했는데 요새는 중산층 이상으로 보이는 손님이 많이 늘었다. 이제 극빈층은 팔려고 내놓을 물건조차 없는 모양이다"라고 했다.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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