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출토 백제 갑옷은 중국산?

2011. 10. 1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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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고학계, 황칠 '명광개' 갑옷 추정

일부 조각에 당 태종 연호 적혀 있어

고문서학계는 당나라 군사 갑옷 주장

660년 7월13일 백제 옛 도읍 웅진(충남 공주)의 공산성은 백제 최후의 운명을 건 대결전을 앞두고 긴장감이 가득했다. 수도 사비성(충남 부여)을 빠져나온 의자왕의 백제군은 공산성에 진을 치고,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전멸시킨 신라·당 연합군과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엿새간 항전도 헛되이 7월18일 의자왕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결국 항복한다. 그는 붙잡혀 당나라로 끌려갔고, 백제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백제 망국의 비운이 어린 이 옛 전장의 자취를 간직한 공산성 안 저수지터에서 최근 공주대박물관이 당시 찰갑옷(가죽·금속 조각들을 꿰어 만든 갑옷) 한벌을 발굴하면서, 이 갑옷의 국적이 민감한 쟁점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가죽 갑옷으로 추정되는 이 갑옷 유물은 거멓게 옻칠을 입힌 대량의 찰갑조각들이 흩어진 모습으로 발굴됐다. 그 가운데 일부 갑옷 조각에 '貞觀十九年(정관 19년:645년)'이란 중국 당 태종의 연호가 붉은색 한자로 적혀 있는데, 이 갑옷이 백제 것인지, 중국 것인지를 놓고 학계의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애초 공주대박물관과 고고학계는 지난 12일 유물 발굴 사실이 언론 등에 알려지자 '문헌에만 전해지던 백제의 명광개 갑옷이 출현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백제 무왕이 626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명광개' 갑옷을 바쳤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실물을 찾은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었다. 13일 열린 현장 공개회에서도 참석한 상당수 고고학자들은 백제 명광개로 추정하거나 단정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1주일여가 지난 지금은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고대 목간과 비석 글귀 등을 연구하는 고문서학계쪽에서 갑옷조각의 연호로 미뤄 이 갑옷은 공산성에 출병한 당나라 군사의 것이 확실하다는 견해를 잇따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갑옷 조각에 쓰여진 중국 연호를 백제가 전혀 쓰지않았다는 점이 유력한 근거다.

중국 당나라 때 편찬된 중국과 변방 지역들의 지리지인 <한원(翰苑)>을 보면, 백제는 연대를 표기할 때 중국 연호를 쓰지않고, 육십갑자간지만 쓴다는 기록이 보인다. 무령왕릉의 묘지석, 창왕명 사리감, 웅진사비 시대의 목간(나무쪽 문서) 등 출토된 백제의 실제 문자 유물들에도 연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백제 목간, 금석문을 연구해온 윤선태 동국대 역사교육과교수는 "백제가 중국 연호를 쓰지않았다는 것은 <한원> 등의 문헌 연구나 고고학적 발굴 등으로 입증된 정설"이라며 "갑옷의 연호가 적힌 시점은 백제와 당나라가 적국으로 대치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적국의 연호를 백제가 썼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도 "발굴 관계자들이 사전에 백제의 연호에 대한 옛 문헌상의 정보를 충실히 검토했어야 하는데, 다소 앞서 나간 느낌"이라고 말했다.

백제에서 당에 바쳤다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명광개도 옛 문헌에 주로 이름만 나올 뿐 , 구체적인 얼개나 쓰임새 등의 실체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수·당나라 때 주로 썼던 갑옷이라는 것과 기본적으로 금속제 재료를 썼을 것이라는

통설 정도다. 고고학자인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명광개는 중국 수당대의 무사모양 도용(도자기 인형)에 주로 나타나지만, 온전한 실물로 전하는 것이 없고, 어떤 재료와 장식을 했는지 실체도 명확하지 않아 이번에 공산성에서 발굴된 갑옷을 명광개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공산성 전투에 참전한 당군이 쓰다 버린 것이나 어떤 이유로 묻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공교롭게도 중국 송나라 때 백과사전격인 <책부원구>를 보면, 이번에 출토된 갑옷 조각 명문에 쓰여진 연대인 645년에 당 태종이 백제에서 금칠(金漆:황칠로 추정)도료를 들여와 '산문갑'(山文甲)이란 갑옷에 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 645년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던 대전란의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 사서를 보면, 당 태종이 당시 요동벌에 출동한 고구려·말갈군을 주필산이란 곳에서 무찔러 명광개 1만벌을 전리품으로 얻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1400여년전 공산성 항전의 자취로 짐작되는 이번 갑옷의 발견은 이런 옛 문헌상의 단편적인 갑옷 기록들과 더불어 더욱 흥미로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앞으로 이어질 갑옷 유물들의 보존처리 작업에서도 재질·명문 분석 등을 통해 한반도 고대 갑옷의 역사와 '공산성 항전'의 비화 등에 얽힌 여러 새 사실들을 쏟아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갑옷의 국적과 쓰임새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 또한 두고두고 이어질 전망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공주대박물관 제공

■ 바로잡습니다.

의자왕의 백제군이 공산성에 진을 치고 신라·당 연합군과 전투를 거듭했으며, 이를 역사가들이 '공산성 전투'로 부른다는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옛 사서에 백제군은 신라·당 연합군과 큰 전투 없이 대치하다, 의자왕이 항복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기자의 착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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