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재벌에 진짜 매를 들 것인가

2011. 8. 1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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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곽정수의 경제 뒤집어보기] 총선·대선 앞두고 재벌 압박 나선 여·야당…선거철 득표 전략에 불과하다는 비판 일어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정부의 과세 방안이 지난 8월5일 조세연구원 토론회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재벌 총수 일가가 소유한 회사가 다른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에 힘입어 기업가치(주식가치)가 늘었거나 영업이익을 내면 매년 상속·증여세를 부과하는 방안이다. 재벌 총수 일가들은 '땅 짚고 헤엄치기'식으로 재산을 불려온 그동안의 일감 몰아주기 관행을 그만두지 않는 한, 앞으로는 매년 수백억∼수천억의 세금을 물게 될 전망이다. 삼성은 이에 앞서 8월1일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사업 철수를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정치권의 '대기업 때리기'를 피하려는 기민한 선제 대응이다. 언론들도 이건희 회장다운 통 큰 결단이라고 치켜세웠다. '대기업 때리기'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쫓는 정치권과 피하려는 재벌 간의 각축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양극화 심화시키는 재벌의 지네발식 확장

여야를 막론하고 MB 정부의 '친재벌 정책 수정'과 '동반성장 정책 추진'을 한목소리로 주장한다. 토론회나 공청회에 가보면, 여당 의원인지 야당 의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지금까지 쏟아낸 관련 정책만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대기업 감세 철회, 동반성장위원회의 동반성장지수 도입, 중소기업 적합업종 및 이익공유제 도입, 일감 몰아주기 규제, 재벌의 MRO 사업 규제,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등. 최근에는 한나라당의 홍준표 대표가 우리은행 등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기업의 민영화로 재벌만 배불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며 국민공모주 형태의 민영화 방안을 내놓았다. 재벌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은 이에 대해 '친기업'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고 당선된 이명박 정부가 2010년 6·2 지방선거 패배, 2011년 4·27 재보선 패배 이후 '대기업 때리기' '반기업'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표를 얻으려는 '표퓰리즘'의 일환으로 대기업 때리기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선거철 단골 메뉴'라고 주장한다.

재벌은 대기업 때리기에 불만을 나타내기에 앞서, 국민이 왜 매를 들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재벌은 대기업 때리기의 근본 배경인 양극화 심화에 1차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중소 협력사들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로 대변되는 불공정 하도급 거래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또 무분별한 사업확장으로 빵, 커피, 떡볶이, 순대, 두부, 막걸리 등 골목 상권까지 잠식하며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의 밥그릇까지 빼앗고 있다. 이제는 문어발이 아니라 '지네발'식 확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반도체, 스마트폰, 자동차, 선박, 철강 등 글로벌 무대에서 당당히 경쟁하는 재벌의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다. 선진국의 글로벌 대기업 중에서 한국 재벌처럼 동네 구멍가게 영역까지 무차별적으로 잠식한 사례가 과연 있는지 묻고 싶다. 재벌이 잘되면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 나아가 일반 국민도 잘살게 되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도 실종 상태다. 재벌의 몸집이나 이익이 늘어나도, 고용·투자·세금 등에서 국민경제 기여도가 비례해서 커지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기업의 고용 없는 성장이다.

재벌의 이런 행태가 지속되는 한 양극화를 개선하기 어렵다.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발전은 물론 사회안정과 공정사회 구현도 불가능하다. 장기적으로는 대기업의 경쟁력에도 부정적이다. 재벌들은 정부나 정치권이 법이나 제도로 강제하기 이전에 스스로 솔선해서 공정한 하도급 거래에 힘쓰고, 무분별한 사업확장으로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자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을 자제하고, 고용창출 등 사라진 대기업의 적하효과를 되살리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법과 제도의 규제 강도는 더욱 세지고 대기업 때리기의 강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선거 때만 납작 엎드려 있으면 된다"

지금처럼 재벌에 대한 '매'를 형식적으로 들면 기업을 망치고 한국 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 삼성의 MRO 사업 철수 결단도 정치권과 시민단체, 학계, 언론의 압박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겠는가?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지난 7월 말 임원 평가시 동반성장 실적을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기업 임직원의 평가 시스템부터 동반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개선하라는 사회의 요청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조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삼성전자 등 대다수 재벌 대기업의 임직원들은 중소 협력사의 납품단가를 많이 깎을수록 높은 고과를 받는 평가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30대 그룹 최고경영자들은 지난해 9월 말 대국민 앞에서 동반성장 정책에 합의하고 성실한 추진을 약속했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재벌과 전경련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동반성장지수 도입과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등 핵심적인 동반성장 정책에 모두 반대하고 있다.

재벌들이 대기업 때리기를 선거와 결부해 흠집을 내려는 것은 공연한 트집이다.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을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정부와 정치인들의 의무다. 이는 민주주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문제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처럼, 선거 전과 후에 정치인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것이다.

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에게 최근 상황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선거를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한 것 아니겠나. 하지만 선거만 끝나면 다시 우리를 찾아와 앞으로 잘해보자고 손을 내밀 것이다. 우리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1년6개월 동안만 납작 엎드려 있으면 된다." 흥미로운 얘기다. 하지만 의문이 뒤따랐다. "야당인 민주당이 집권하면 다르지 않겠는가?" 그는 잠깐 기자를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누가 집권하든 달라질 것은 없다. 누가 여당이 되든, 우리에게 다시 올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이후 친재벌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재벌의 무분별한 확장과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하고, 재벌이 은행을 갖지 못하도록 한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하고,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지주회사제도를 형해화했다. 저금리, 고환율, 감세 등 재벌에 유리한 경제정책에 올인했다. 그사이 서민과 중소기업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지금의 양극화 심화는 MB노믹스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동반성장·친서민·공정사회를 강조하고, 대기업들을 때리기 이전에 지난 3년6개월 동안 잘못된 정책으로 국민을 더욱 힘들게 한 것에 대해 반성과 사과부터 하는 것이 순서다.

노무현 대통령은 9년 전 그 어느 정권보다 강력한 재벌 개혁을 천명하며 집권했다. 노 대통령은 "나는 최초로 재벌 개혁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일부 개혁 성과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한 예로 재벌들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규제는 노무현 정권 초기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도입으로 이미 토대가 마련됐다. 하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않아 재벌들이 세금 없는 대물림에 일감 몰아주기를 이용하는 관행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MB, 3년6개월의 친재벌 정책 반성부터 해야

선거 때만 되면 대기업 때리기가 되풀이되는 것도 정치권의 이런 행태와 무관하지 않다. 선거 때는 적당히 매를 드는 척하다가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슬그머니 내려놓는 짓을 반복하다 보니, 경제의 근본 체질이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과 대선에서는 국민이 더욱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이 단지 표를 얻으려고 형식적으로 대기업 때리기를 하는지, 아니면 국민의 고통을 해결하고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려고 진심으로 매를 들었는지 가려내야 한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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