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 토막살해범의 눈물

2011. 4. 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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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앤 더 시티

내 지나친 사랑에 스러진 '알로카시아 오도라'

알로카시아가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알로카시아 오도라. 굵은 육질의 뿌리줄기에 큰 방패 모양의 잎이 서너 개 달려 있는 화초다. 키가 2m나 되는 거대한 화초라 쉽사리 죽을 상은 아니다. 그런데도 죽었다. 거대한 줄기와 뿌리가 통째로 썩어서 진물을 질질 흘리며 죽었다. 알로카시아가 죽은 지 1주일은 지난 뒤에야 나는 그 사실을 발견했다. 왠지 퍼석퍼석해진 줄기를 손으로 살짝 눌렀더니 허깨비처럼 푹 꺼져버렸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고 다녔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이미 내 알로카시아는 요단강을 건너도 오래전에 건넌 상태였다.

알로카시아를 산 건 지난겨울이다. 나로 말하자면 선인장도 말려 죽일 만큼 화초에는 재능이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는 온실을 한번 꾸며보고 싶었다. 삭막한 독신남의 공간에 초록의 싱그러움 같은 걸 한번 끼얹어보고 싶었다. 알로카시아를 권한 건 <씨네21>의 주성철 기자였다. 수많은 화초를 자식처럼 키워온 그는 초보자에게는 알로카시아가 딱이라 했다. "물도 많이 줄 필요 없고 더위나 추위도 잘 견뎌." 옳거니. 바로 그거였다.

옳거니는 무슨 옳거니. 1년을 견디지 못하고 알로카시아가 죽은 이유는 무름병이라 부르는 '지나친 사랑' 때문이었다. 겨우내 보일러에 바싹 마를까 걱정이 된 나머지 지나치게 물을 준 게 결정적 실수였다. 내가 끼얹는 지나친 애정에 알로카시아는 줄기와 뿌리가 썩어 죽었다. 나는 빵 자르는 칼로 알로카시아의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내 키만한 줄기와 뿌리는 모두 일곱 토막으로 절단해서 비닐봉지 일곱 개에 나눠 담았다.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가 따로 없었다. 절단 부위에서 시커먼 액이 눈물처럼 흘러나왔다.

비닐봉지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환청이 들려왔다. 오래전 연인이 헤어지며 했던 말이 들려왔다. "넌 나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애. 그게 부담스러워." 서른과 마흔의 경계에 선 마포의 독신남은 알로카시아 시체를 담은 비닐봉지 일곱 개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채 마음으로 울었다. 사랑이 나를 울게 하고, 사랑이 나를 화초 토막살해범으로 만들었다.

글·사진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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