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비는 얼마나 똑똑합니까.. '현명한 소비 체험수기'서 한 수 배우기
김태연(25·대학 3학년·인천 송도동)씨가 지난해 9월 어머니와 집 근처 대형마트에 간 까닭은 견과류를 사기 위해서였다. 전날 이곳에서 11만원어치 장을 본 터라 달리 살 것도 없었다. 오직 간식거리 호두와 땅콩이 필요했다. 늘 사던 견과류 상품 가격은 약 2만원.
마트 입구에서 식품매장 견과류 코너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먼저 화장품 코너에서 발목이 잡혔다. 판촉원에게 붙잡힌 어머니는 샘플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며 '미백 효과'를 체험해야 했다. 간신히 발길을 돌려 찾아간 식품매장에선 행사요원이 '5만원 이상 구입시 5000원 할인' 쿠폰을 건넸다.
만두 갈비 돈가스 등 시식코너를 거쳐 견과류 코너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장바구니에 만두 두 봉지, 특별할인 행사 중이라는 도넛 한 상자, "아까 보니 냉장고에 우유가 없더라"며 어머니가 담은 우유 2병, "마시는 식초가 몸에 좋다는데" 하며 집어든 식초음료 등이 담겨 있었다.
계산대 모니터에 찍힌 금액은 6만5000원, 할인 쿠폰을 제시해도 6만원. 2만원짜리 간식 사러 갔다가 그 세 배에 해당하는 '쇼핑'을 했다.
이렇게 꼭 필요하지 않아도 뭔가 끊임없이 사게 되는 현대 소비자를 영국 임상심리학자 올리버 제임스는 바이러스 감염 환자에 비유했다. 저서 '어플루엔자(Affluenza·부자병)'에서 그는 "풍요(Affluence)와 유행성질병(Influenza)의 합성어인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는 TV와 광고를 타고 확산된다.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만들며 우울과 불안을 퍼뜨린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가을 이 책을 국내에 출간한 알마출판사가 최근 독자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항할 백신을 갖고 계십니까?"
지난 2월부터 두 달 간 진행된 '현명한 소비 체험수기 공모전'(알마출판사·아름다운가게·YES24 공동 주최)에 소비자 120명이 '욕망' 대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응모했다. 김태연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견과류 쇼핑' 사건을 겪은 날 저녁, 김씨 가족 4명은 머리를 맞대고 재발 방지책을 고민하다 대형마트 쇼핑의 4대 원칙을 세웠다. 그가 수기에서 '우리 집 소비 조례'라고 표현한 원칙은 이렇다.
①대형마트에는 매월 둘째, 넷째 금요일에만 간다. 견과류 간식처럼 중간에 필요한 게 있으면 동네 슈퍼마켓이나 재래시장을 이용한다. ②대형마트에는 반드시 밥을 먹고 간다. 시식코너의 유혹을 떨쳐내 충동구매를 않기 위해서다. ③대형마트에선 미리 적어둔 구매목록대로만 산다. 이를 위해 식탁과 거실에 평소 틈틈이 작성하는 구매목록 메모장을 비치한다. ④대형마트용 가계부를 따로 작성한다. 쇼핑 뒤 정말 필요해서 샀는지 되짚어보는 과정이다.
김씨는 "소비 조례를 실천한 지 6개월 만에 생필품과 식료품 지출액이 예전보다 평균 30%, 어떤 달은 50%까지 줄었다. 먼저 가계 재정에 여유가 생겼고, 가족들도 자연히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혼자 자취하는 회사원 심미선(30·여)씨에게 '어플루엔자 백신'을 제공한 사람은 이삿짐센터 아저씨다. 냉장고와 드럼세탁기가 갖춰진 오피스텔에 살다가 그런 옵션이 전혀 없는 서울 개포동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지난 2월. 그에게 아파트를 비워줄 전 입주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저희 냉장고와 세탁기가 아직 쓸만한데, 저희는 아버님 댁에 들어가게 돼서 필요가 없거든요. 혹시 중고로 구매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이미 인터넷 쇼핑몰을 여러 곳 누비며 새 냉장고와 세탁기를 주문해놓은 심씨는 이 제안을 사양했다. 그리고 이삿짐센터에서 견적을 내러온 날, 심씨 이사를 세 번째 맡게 된(서울 생활 10년간 한 업체에만 이사를 맡겼다) 아저씨는 "재작년 여기로 이사 올 때 냉장고랑 세탁기 누구 줬지요? 또 사게 생겼네요"라고 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이삿짐 아저씨도 기억하는 내 냉장고와 세탁기를 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예요. 난 이사하면서 예전처럼 당연히 새로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지켜본 그분은 왜 그런 낭비를 하냐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던 거죠. 돌이켜보니 서울 온 지 10년 만에 세 번째 냉장고와 세탁기를 주문한 거더군요."
심씨는 주문을 취소하고 전 입주자의 냉장고와 세탁기, 식탁과 가스레인지까지 넘겨받아 고장 없이 잘 쓰고 있다고 한다. "이것도 일종의 나눠 쓰기, 함께 쓰기 아닐까요? 소비문화, 이사문화로 정착되면 어떨까요?"
장인태(27)씨가 대학 시절 어플루엔자에 감염된 순간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였다. 자전거로 통학하며 차비 줄이고, 친구 자취방 '기습'해 점심값 아끼며 나름대로 알뜰했던 그도 데이트할 때만은 망설임 없이 지갑 여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정말 난감하더군요. 여자친구 데리고 싼 곳만 찾아다닐 수도 없고, 데이트 비용의 상당 부분을 내던 여자친구도 부담스런 눈치고…. 고민 끝에 찾아낸 아이디어가 '데이트 통장'을 만드는 거였어요."
그는 2학년 때인 2004년 같은 학교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함께 통장과 현금카드를 만들었다. 매월 각각 데이트에 쓸 돈을 이 통장에 입금하고, 그 한도 안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어떤 날은 비싼 레스토랑에 가고, 통장이 바닥을 보이려 하면 분식집을 이용하는 식이다.
"10개월쯤 뒤에 데이트 통장을 결산해보니 씀씀이가 크게 줄어든 건 아닌데 정말 다양한 데이트를 했더라고요. 정해진 금액으로 가장 잘 놀 수 있는 걸 찾아냈던 거죠. 서로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고요. 돈을 제대로 썼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하대 소비자아동학과 4학년 장선아(23·여)씨는 지난해 9월 15만원짜리 MP3를 산 지 한 달 만에 잃어버렸다. 영어공부를 위해 다시 사야 하는데 수중에 남은 용돈은 5만원 정도. 새 MP3를 사기 위해 수업 시간에 배운 '소비자 의사결정 기법' 중 한 가지를 이용했다.
인터넷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5만원 안팎의 MP3 세 종류를 골랐다. 상품 선택 기준 네 가지를 정하고 각각 우선순위에 따라 기준점수를 차등화했다. ①가격(5점) ②디자인(4점) ③브랜드(3점) ④성능(2점). 항목별로 세 상품을 평가해 1∼5점을 매겼다.
A제품은 4만8000원으로 가장 저렴하니 ①번 5점, B제품은 대기업 브랜드가 아니라서 애프터서비스가 부족할 수 있으니 ③번 4점…. 이렇게 매긴 점수에 각 항목 기준점을 곱한 뒤 모두 합산하니 A제품이 66점으로 가장 높았다.
그는 "제품을 꼼꼼히 분석하지 않고 매장에 가면 충동구매나 과시소비를 하기 쉬워요. 제일 좋은 MP3는 아니지만 아직도 불만 없이 잘 쓰고 있죠. 요즘은 화장품도 같은 방법으로 사기 때문에 후회하고 다시 사는 경우가 크게 줄었어요"라고 말했다.
문보령(31·여·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씨는 '새 옷 한 벌 사면 반드시 헌 옷 한 벌 버리는' 습관을 소개했다. 헌 옷을 버리기 위해 옷장 정리를 하다 보면 잊어버려 안 입던 옷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새로 사야 할 옷이 한 벌 줄어든다는 것이다.
한 달 용돈이 32만원이라는 최진명(32·아동복지교사·인천 계산동)씨는 이 돈으로 연간 각종 공연 30∼40편, 영화 50여편을 관람하고 책 80∼90권, 음반 20여개를 구입하며 월드비전을 통해 인도 빈민가 소녀에게 월 2만원씩 후원하고 있다. 휴대전화는 20초 안에 통화 끝내기, 30분 이내 거리는 무조건 걷기, 택시 절대 안타기 등의 원칙을 실천하니 용돈의 절반인 월 15만원가량을 문화비(공연 영화 등도 할인 혜택 활용)에 쓰고도 기부할 여력이 남더라고 했다.
'잘살다(부유하게 살다)'와 '잘 살다(탈 없이 순조롭게, 만족스럽게 살다)'의 사전적 의미는 다르다. 알마출판사에 배달된 120편의 수기는 '잘사는' 대신 '잘 사는' 법을 아는 이들의 이야기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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