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가고 조직만 남았다.. 21세기 대한민국 조폭들이 사는 법
역전, 시장, 오거리 등 도시 중심가에는 어김없이 이들이 있다. '땅벌' '식구' 같은 토종 이름부터 '월드컵' '그랜드' '타이거' '파라다이스' 등 영어 문패까지 다양하다. 개중에 조양은 김태촌 같은 이들은 '전국구'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주먹 하나로 어둠의 세계를 주름잡아온 조직폭력배들이다.
대검찰청은 지난 12일 전국 관리대상 조직폭력배(간부급)가 2001년 4153명에서 지난해 5450명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조직 수도 같은 기간 199개에서 223개로 증가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신문지상에서 이들의 '활극' 보도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일선 경찰서에서도 조폭 사건 접수는 뚝 끊겼다. 오히려 사법당국 관계자들은 "전국구 조폭의 시대가 끝났다"고 입을 모은다.
덩치를 키운 조폭이 일제히 합법적인 사업가로 변신이라도 한 걸까. 21세기 조폭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노른자위' 서울 강남
한때 서울 강남 장악은 지방 조폭이 '전국구 조폭'(전국을 무대로 하는 조폭)으로 성장하는 지름길로 통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돈이 흘러 다녔기 때문이다. 강남은 주로 광주·전남 출신과 서울 토박이 조직의 격전지였다. '먹을거리'가 많았던 경상도 조폭은 굳이 서울행 열차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경찰청 폭력계 관계자는 "전국에서 이름 좀 있다는 조직은 강남에 유흥업소나 음식점 등의 점포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칠성파 서방파 양은이파 등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1세대 조직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군웅할거 시대라서 다툼이 많아졌을 법한데 범행 빈도는 낮아지고 '칼부림' 같은 조직 간 세력 다툼도 사라졌다.
한 조직이 강남 중심가를 차지하는 대신 고만고만한 조직들이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소규모로 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 지역에서 강력범죄로 검거된 조폭 사건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처법)상 '범죄 단체'가 아닌 '조직성 범죄(단순 집단 범죄)' 1건에 그쳤다. 현재는 10여개 군소 조직이 지엽적 활동을 하는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지난 10년간 조폭 수사를 전담한 서울중앙지검 강력부 무술수사요원 황모 계장은 "조양은 김태촌 등 전국구니, 1세대니 했던 조직들은 이제 간판만 남았다. 사법당국 감시를 피해 점조직화하고 있고, 갈취·폭력형 범죄도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최근 황 계장팀은 조폭 합숙소 한곳을 급습했다. 신입 조직원에게 행동요령과 폭행기술 등을 가르치는 곳이다. 숙소에서 발견된 사시미칼(회 뜨는 칼)이 독특했다. 칼날 아랫부분을 테이프로 둘둘 말아놓았다. 칼 손잡이에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종이 등을 감기는 하지만 칼날에 테이프를 감은 적은 없었다.
"칼이 깊게 들어가면 사람이 죽잖아요. 안 죽을 정도로만 찌르기 위해 테이프를 감았던 거죠. 조폭들 스스로 강력범죄를 경계하고 있어요."(황 계장)
합숙소나 사무실에 야구방망이 등 '연장'을 숨겨놓는 경우도 줄었다. '상황'이 발생하면 근처 대형마트에 가서 방망이를 사와 쓰고 버릴 정도로 조심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민생침해사범 단속을 위해 2008년 이후 매년 7개월씩 조직범죄 집중단속을 벌이는 등 사법당국의 공세가 거세진 데 따른 변화다. 이런 대규모 단속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20여년 만이다.
유흥업소 일색이었던 사업 방식도 다양화됐다. 갈취 등 불법 이권 개입 대신 합법적인 '먹을거리' 물색에 나서고 있다. 연예 등 각종 기획사와 건설업, 대부업, 게임업은 물론 기업 인수·합병(M&A) 시장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여전히 유흥업소가 주된 사업장이긴 하지만 철거 용역이나 연예 기획사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꾀한다는 첩보가 있어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폭 수사는 기본적으로 근거지 관할 경찰서가 담당한다. 전북 전주 조폭이 상경해 강남에서 사업한다면 강남서가 아닌 전주 관할 경찰서에서 추적한다. 강남서 관계자는 "어느 지역 애들이 강남으로 진출했다더라, 어떤 업종으로 바꾼다더라, 조직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더라 식의 정보가 입수되면 상부에 보고하고 담당 경찰서에 알려준다"고 했다.
서울지역에 존재하는 조폭은 모두 23개파, 507명(지도 그래픽 참조). 전체 31개 경찰서 가운데 강남서에서 20% 정도를 담당하고 있다. 일부는 활동을 멈춘 1세대지만, 중간 간부들이 조직 간판을 등에 업고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어 관리대상에서는 삭제하지 않고 있다.
늘어나는 조폭, 왜?
조폭은 예전의 화려함을 잃은 지 오래다. 강남서 관계자는 "겉으로는 외제차에 검은 양복을 빼입고 다니지만 숙소를 털어보면 돈 한 푼 없이 거지꼴로 사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발효 이후 유흥업소 영업도 힘들어졌고, 시민 신고의식이 높아지면서 보호비 명목 등의 갈취도 쉽지 않아졌다. 집중단속 기간에는 "지나가던 학생이 조폭에게 돈을 빼앗겼다"는 '자질구레한' 제보까지 들어올 정도다.
그래도 조폭 수는 늘고 있다.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왜일까.
경찰청 관계자는 "추종 세력들이 문제"라고 했다. 조직 행동대원급을 '형님'으로 모시는 20대 안팎의 젊은 청년이 많아졌다. 이들 중 일부는 고스란히 조직원으로 흡수된다.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주로 이런 부류다. 조폭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모방심리 탓이다. 이 관계자는 "영화나 드라마 속 조폭을 보고 동경을 갖거나 학원폭력이 사회로 이어지면서 추종세력 수는 줄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이유는 '분가(分家)'에 따른 영세화 경향. 큰 조직의 간부들이 별도 조직을 만들면 일시적으로 조직원 수가 증가한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 관계자는 "일반 음식점이나 영세 건설업 등을 차지하며 소규모로 분가한 조직이 늘면서 숫자는 일정 부분 증가했다"고 말한다. 대신 조직 간 유혈 폭력사태는 줄어들었다. 이권이 충돌할 경우 전쟁 대신 물밑 협상으로 타결한다.
처벌은 어려워졌다. 범죄단체로 처벌하려면 조폭 합숙소를 찾아내는 게 중요한데 점점 적발이 어려워지고 있다. 합숙소 연락처는 관리자 외에는 비밀이다. 단속 눈을 속이기 위해 합숙소를 주택가 등에 마련하기도 한다. 어렵게 찾아내더라도 흉기나 조직 구성원과 관련된 증거는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일회성 범죄로 처벌하긴 쉽지만 범죄 조직 전체를 박멸하기 어려운 이유다. 공판 중심주의 도입으로 피해 진술을 받기도 힘들어졌다. 피해자가 보복이 두려워 법정에 나서길 꺼려한다.
경찰의 '조폭 관리'는
폭력조직은 폭처법 제4조에 의해 '범죄 단체'로 처벌받는다. 두목은 10년 이상 징역에서 사형까지, 간부는 7년에서 무기징역형까지 받게 된다.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신흥 조직이 주로 걸려든다.
경찰은 매년 조폭 관리대상을 정한다. 기존 리스트 가운데 와해된 조직은 삭제하고, 신규 조직을 등록한다. 올해 전국적으로 17개파가 삭제됐고 10개파가 새로 관리대상에 올랐다. 올 들어서는 아직까지 폭처법 4조로 처벌된 조직이 없다. 잔뜩 웅크려 있기 때문이다.
관리대상만 73명인 '칠성파'는 전국 최대 폭력조직이다. 그렇지만 지난 6일 경찰에 검거됐다가 검찰의 보완수사 지시로 8일 석방된 두목 이강환(67)씨의 범죄 혐의는 폭행 사주와 갈취 등 '잡범' 수준이었다. 인천광역수사대가 수사 중인 인천 주안파 조직원들과 전남 장흥 출신 9명의 폭력 사건(지난 2월)은 동네 패싸움 수준.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 조폭이 사라질 가능성도 있을까.
"젊은 사람들은 조폭 하면 의리를 떠올리지만 실상은 돈 되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드는 하이에나에 불과하죠. 의리는 무슨…. 조폭의 변치 않는 본성은 폭력, 갈취입니다. 지금은 과도기이지만 언제 기업화해서 뒤통수를 칠지 모르죠. 조폭, 안 없어져요."(강남서 관계자)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goodnews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