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한마디 못하고도 100대 1 경쟁률 뚫었지만

2009. 10. 1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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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지금 내 영어 실력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믿지 못할 거다. 내가 수능시험 외국어(영어) 영역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젠 나도 어디 가서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는 처지다. 마지막으로 수능시험을 본 게 1994년이기 때문이다.

고작 내세우는 외국어 실력이 15년 전, 그러니까 강산이 한 번 하고도 반이 변할 정도의 옛날 옛적 수능시험 성적이니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게다가 만점을 받은 것도 아닌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니, 이건 뭐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영어 때문에 상처 받은 일도 없고, 영어권 국가에 특별한 불만도 없다. 그냥 놀고, 연애하고, 데모하느라 영어 공부를 안했다. 수능 이후, 영어사전을 펼쳐본 기억도 거의 없다. 친구, 선후배들이 도서관에서 토익 등 취직 준비를 하던 4학년(2000년), 나는 게임방에서 열심히 스타크래프트만 팠다.

수능 영어 '거의 만점'의 기억이 세월의 흐름에 소진되고, 내 머릿속에 기초 생활영어,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 수준의 단어 몇 개만 남아 있을 즈음, 잊을 수 없는 '영어 굴욕사건'이 벌어졌다. 그것도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에서!

미국에서 벌어진 '영어굴욕사건'

무한도전 영어울렁증 극복편. 나도 극복해야 할 사람 중의 하나.

ⓒ iMBC

때는 2년 전인 2007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선을 앞두고 한국언론재단에서 실시한 한 언론인 연수에 참가했다. 연수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약 보름 동안 미국을 방문해 그 지역의 언론 상황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보름 내내 통역과 안내자가 함께 하기 때문에 영어로 인한 걱정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사건은 미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워싱턴DC 댈러스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벌어졌다. 출국 이전부터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넌 딱 보면 테러리스트가 떠오르니까, 가능한 화사하게 옷을 입고 웃으며 입국심사를 받으라"는 충고를 받았다.

지인들의 지적대로 '실실' 웃으며 입국심사에 들어섰다.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 것일까. 백인의 입국 심사원은 나를 보자마자 인상이 굳어졌다. 나는 그래도 해맑게 웃으며 준비해 간 비장의 인사말을 날렸다.

"Hi!" 하지만 나의 당당한 영어, 아니 영어 단어는 여기까지였다. 딱딱하게 굳은 백인 입국심사원의 표정에 내 마음이 얼어버렸던 것일까. 나는 이후부터 계속 버벅대기만 했다. 입국심사원의 태도는 마치 테러리스트 대하듯 더욱 고압적으로 변했다. 그가 물었다.

"헤이, 너 한국에서 한 달에 얼마 벌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몇몇 단어를 조합해 봤을 때 그는 분명 그렇게 물었다. 나는 당당하고 짧게 내 수입을 말했다.

"어바웃 투 밀리언 달러!" 약 '이백만원'을 번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영어가 부족한 나는 '원'을 '달러'로 환산하지 않은 채 그냥 "이백만 달러!"라고 외쳐버린 것이다. 한 달에 약 20억 원을 번다니! 입국심사원의 눈이 번쩍 커진 건 당연했다.

"와우! 정말?(Wow, really?)" 백인의 놀라움에 나는 자신감이 충만해져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당근이지!(Sure!)" 이어 아는 단어를 총 동원하고 손짓 발짓을 해가며 덧붙였다."왜 놀라고 그래? 한국에서 '이백만 달러'는 돈도 아니야. 평균 수입 이하야!" "(더 놀란 입국 심사원) 와우! 정말?" "당근이지!" 입국 심사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거짓말!(You lie!)"을 반복했다. 이어 그는 "너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이번엔 질문이 제대로 들렸다. 그래서 다시 당당하게 대답했다.

"기자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서 일하는데, 너 알어?" "와우! 무슨 기자가 월급을 그렇게 많이 받냐?" "오우~ 노! 절대 많은 거 아니다. '이백만 달러' 절대 많은 월급 아니다." "이백만 달러… 거짓말!" 이렇게 한참을 그와 '공방'을 벌였다. 입국심사원이 "절대 믿을 수 없다"며 다른 공항 직원을 불러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할 즈음에야 알게 됐다. 200만원을 '투 밀리언 달러'로 잘 못 말했다는 것을.

다시 손짓 발짓 동원해 굴욕적으로 "Sorry"를 연발하고, 애원의 눈빛을 보내고 나서야 입국심사원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계속 당황한 나는 "안경을 벗으라"라고 할 때는 지문을 찍는 줄 알고 손가락을 댔고, 지문을 찍겠다고 했을 땐 안경을 벗었다. 결국 나는 연수를 함께 온 동료 기자들이 있다는 걸 확인 받고 나서야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당시 10명이 넘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결국 나를 구원해 준 셈인데, 참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들이 "오마이뉴스 기자들은 '200만 원'과 '200만 달러'도 구분 못한다"고 생각할 듯했다. 어쨌든 미국 연수 보름 동안, 나는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듯 조용히 죽어 지냈다.

이런 내가 회사에는 어떻게 입사했냐고?

그러면 이제 "오마이뉴스 기자가 왜 그렇게 영어를 못하느냐"는 물음이 나올 것 같다. 아마 워싱턴DC 댈러스 공항에서 나를 구출해 준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그런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이제 그에 대한 의문을 풀어줘야 할 듯하다.

역시 지금의 내 영어 실력을 보면 절대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영어 면접까지 보고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2004년 < 오마이뉴스 > 에 입사했다. 당시 입사 시험은 서류, 필기, 기사쓰기, 1차 면접(영어면접 포함), 2차 면접 등 총 5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영어 면접은 < 오마이뉴스 > 인터내셔널에서 근무했던 캐나다 국적의 토드 태커 기자가 오연호 대표, 정운현 편집국장 등 4명의 면접위원과 함께 직접 진행했다. 영어 면접은 다른 여성 지원자 한 명과 함께 봤다. 일반 면접에 이어 드디어 시작된 영어 면접 시간. 토드 태커 기자가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Q) Dkjadjfl adfjp qfpjdjojfmas ldvmlqwpof vnlanvaqkv pdlqhvlvla? 내 귀에는 정말 저렇게 들렸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굴욕적으로 말했다."Sorry, I don't know Your question."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옆의 여성지원자는 용하게(?) 그 질문을 알아들었는지 영어로 길게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토드 태커와 이 지원자는 오랫동안 둘만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멍하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속으로 '이야, 얘 영어 디게 잘 하네'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그 때 오연호 대표 등 다른 한국인 면접위원은 한심하게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이어 토드 태커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나는 시종일관 "I don't know"만 반복했다. 창피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사실 나는 영어 면접을 준비하며 단 하나의 말만 외워갔다.

'나는 영어를 못한다, 하지만 헝그리 정신은 있다!(I can't speak English. But I have Hungry mind!)' 하지만 준비한 이 문장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하는 내가 불쌍해 보였던 것일까. 오연호 대표가 한국말로 내게 말했다.

"그럼 이거 하나 대답해 보세요. 아주 쉬운 거 물어볼게요." 이어 오 대표는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듯이 아주 천천히 영어로 물었다."당신이 지금까지 방문한 도시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제대로 귀에 들어왔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며 당당히 말했다."Gurey!(전남 구례군을 말한 것임.)"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오 대표는 '그게 다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난 한 마디 대답했다는 환희가 가슴에 마구 퍼져 희열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오 대표가 물었다.

"Why?(왜?)" 허거덕. 나는 갑자기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세상이 하얗게 보였다. 간신히 대답했는데, '왜?'냐고 묻다니.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한국말로 오 대표에게 따지듯 말했다.

"아니, 좋아하는 도시가 어디냐고 물어서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 좋아할 때 이유가 없듯이, 도시 좋아할 때도 이유는 없어요!" 그러자 오 대표는 어린아이 타이르듯 "그래도 이야기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영어 단어와 손발 짓을 동원해 마치 쇼를 하듯이 설명했다.

"구례는 전남의 아주 작은 군이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지리산도 있고, 섬진강도 있다.조용하고 깨끗하기도 하다. 훗날 그곳에 내려가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제쳤다. 짙은 참담함이 느껴졌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이 서른이 될 동안 좋아하는 도시에 대해 영어로 설명도 못하는 내가 참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내 이름은 그곳에 있었다. 함께 면접을 보며 토드 태커 기자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그 여성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내가 붙었을까. 도대체 왜?

나도 안다... 자랑은 아니라는 거

어느 집에나 있을 영어교재. 나는 이제 영어를 공부할 생각이다. '폼' 잡으려는 게 아니라, 기자로서 다른 나라 신문을 읽으며 정보를 얻고 싶어서. 그리고 세계여행을 위해서.

ⓒ 최은경

이런 의문은 몇 년 전 회사의 전체 회식 때 풀렸다. 그날 오 대표는 말했다. 구례를 좋아하는 이유를 밝힐 때 손발을 휘저으며 설명을 했는데, 스스로 답답했는지 내가 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고. 그래서 자신과 다른 면접위원이 '이 놈이 책상을 엎으려고 하나?'하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고 말이다. 오 대표는 "책상 친 것 때문에 뽑았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영어 면접 때 책상 내려쳐서 직업 기자가 된 셈이다.

나는 여전히 영어를 못하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토익이나 토플 시험을 본 적이 없다. 영어 못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끔씩 부끄럽게 생각한다.

참 어려운 일이겠지만, 나는 이제 영어를 공부할 생각이다. 회사가 요구하는 것도, 승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끔씩 < 뉴욕 타임스 > 를 읽고, CNN을 청취하고 싶다. '폼' 잡으려는 게 아니라, 기자로서 다른 나라 신문을 읽으며 정보를 얻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꿈 중에는 < 론니 플래닛 > 을 들고 세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있다.

영어를 못하면 세계 여행을 해도 답답할 것이고, 영어권 국가의 신문을 읽을 수도 없다. 등수와 평가의 대상이 아닌, 그리고 생존의 조건이 아닌 필요와 행복을 위한 영어라면 나도 잘할 수 있을 듯하다.

한 1년 쯤 지나면, '200만 원'과 '200만 달러'도 구분하고, 구례군을 좋아하는 이유를 영어로 설명할 수 있으려나?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깡'을 갖고 "Let's go"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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