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의 로그 인]그리운 어른들
오래전 스승인 신경림 시인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세상이 막 돌아가는데 어르신들은 대체 뭐하고 계시는 건가요? 시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 번도 기운 적이 없노라고. 그냥 내 갈 길을 걸어왔을 따름이라고.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세상이 왼쪽으로 기울면 그이가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일 테고, 세상이 오른쪽으로 기울면 그이가 왼쪽에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다.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답답할 만큼 침묵을 지키며 문학정신만을 강조한다고 여긴 적도 있다. 남들 다 옛일로 치부하며 모르쇠로 일관할 때 뒤늦게 문학인의 양심과 의무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라도 날까봐 대개의 문인들이 한사코 거절했던 불편한 지면에도 시인은 기꺼이 글을 주었고, 저마다 왼쪽에 서 있는 걸로 여겨질까봐 함구할 때 역시 시인은 변함없이 당신의 견해를 밝혔다.
사람, 생명, 평화의 길을 찾는다는 오체투지 순례단이 서울에 들어왔다.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중에도 당신들은 묵묵히 그 길을 걸어왔다. 어느 시인은 '동요하는 배들은 닻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어른이란 저 높다란 돛대 위에서 폼나게 휘날리는 깃발이 아니다. 가야 할 길을 명징하게 가리키는 선장의 손가락 끝과 같은 지엄한 존재도 아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 닻이 되어 주는 존재들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 때마다 그쪽으로 휩쓸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네 갈 길을 가라고, 그 길이 바로 이곳이라고 스스로 닻이 되어 폭풍우 한가운데 정박할 줄 아는 이들이다.
길 위에서 오체투지하여 스스로 길이 되어주는 이들이다. 함석헌이 그렇고 장기려가 그렇고 문익환이 그렇고, 우리 곁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리워지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가 남겨두고 온, 어느 심해에 여전히 가시처럼 박힌 채 쓸쓸히 녹슬어가는 닻들.
< 손홍규 소설가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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