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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Bretholz(columnist)
As a survivor of the Holocaust, I am writing to speak out for those who were silenced by the Nazis and their French collaborators. On Nov. 6, 1942, I was on a train traveling from the holding camp of Drancy, located near Paris, to Auschwitz. That train was composed of 20 cattle cars, each holding 50 doomed people for a total of 1,000.
More than 70 of such convoys left Drancy for Auschwitz from March 1942 to September 1944. Pregnant women, mothers nursing their babies, whimpering children, the elderly ― men and women alike, were shoved into these cattle cars with little room to breathe. Each of us was given a slab of stale bread, a small portion of cheese and a can of sardines, though no means to open it.
Our "bathroom" was one bucket for the entire car. In no time, it overflowed, leaving all of us standing, squatting, and sitting in human waste. Dehumanization had begun in earnest. Residents of the town of Drancy looked the other way as the train, filled with misery and despair, started its journey to Auschwitz. We were a part of the war they wanted to ignore.
Some on board understood our fate, while others clung to optimistic hope. As I considered escaping, an elderly woman emboldened me not to give up. She said "If you jump and succeed, you'll be able to tell the story. Who else will do it?"
Fortunately, I managed to leap from that train before it reached the German border, and spent the next four years running for my life, always one step ahead of those who wanted me dead. Of the 1,000 Jews that left Drancy that morning, many died en route and 773 were gassed on arrival at Auschwitz. Those who remained were forced into labor, and only five of them survived. In May 1945 the war ended. I had slipped through the Nazis' fingers several times, both before and after my escape from the train. Most of my family was not so fortunate.
In 1947, I arrived in America to start a new life. Today, I am a United States citizen. I live according to American laws and honor our ideals. A fundamental American principal is that every person has the right to access the legal system. But for every rule, unfortunately, there is an exception.
I am one of more than 600 individuals suing the French national railroad for its World War II role in deporting Jews and other "undesirables" from our homes and delivering us to Auschwitz and other Nazi death camps.
나치에 협력한 죄를 고발한다레오 브레톨즈(美 칼럼니스트)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필자는 나치와 프랑스 협력자들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을 대변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필자는 1942년 11월6일 파리 부근에 있는 드랑시의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이동하는 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 열차는 20량의 소 운반용 화물차로 구성되었다. 차 한 량에는 죽음을 앞둔 50명씩 타고 있었다. 전체 인원은 1000명이었다.
1942년 3월부터 1944년 9월까지 그러한 호송열차가 70대 이상 드랑시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임신한 여자들과 간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들, 흐느껴 우는 어린이들, 남녀 노인들이 숨쉴 공간조차 거의 없는 소 운반용 화물차 안에 우격다짐으로 태워졌다. 우리는 한 사람마다 묶은 빵 한 조각과 작은 치즈 한 덩어리 및 정어리 통조림을 받았는데 깡통을 딸 수 있는 도구는 없었다.
우리의 '화장실'은 화물차 한 량 전체에 양동이 하나뿐이었다. 양동이는 금방 넘쳐흘렀고 우리 모두는 배설물 속에 서 있거나 쪼그리고 앉거나 주저앉아 있었다. 인간성 말살 행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비참한 상황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태운 열차가 아우슈비츠를 향해 출발할 때 드랑시 주민들은 외면했다. 우리는 주민들이 무시하고 싶었던 전쟁의 일부였다.
열차에 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의 운명을 알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낙관적인 희망에 매달렸다. 내가 탈출을 고려하고 있을 때 한 노부인이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당신이 뛰어내려 성공하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가 그 일을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다행히도 나는 독일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가까스로 열차에서 뛰어내렸고, 다음 4년 동안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다녔다. 내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보다 나는 항상 한 걸음 앞서 움직였다. 그날 아침 드랑시를 떠난 1000명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773명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강제노동을 했고 그들 가운데 5명만 생존했다. 1945년 5월에 전쟁이 끝났다. 나는 열차에서 탈출하기 전과 후에 나치로부터 몇 차례 도망을 쳤다. 내 가족의 대부분은 그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나는 1947년 미국에 도착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현재 나는 미국 시민이다. 나는 미국의 법에 따라 생활하며 우리의 여러 가지 이상을 존중한다. 미국의 근본적인 원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이 사법제도를 이용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 나는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과 다른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부터 추방하여 아우슈비츠와 다른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넘기는 일에서 담당한 역할을 이유로 프랑스 국영철도를 고소한 600명 이상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역주=오성환 외신전문위원
suhwo@segye.com
해설판 in.segye.com/english 참조
▲whimper:(개 등이) 낑낑거리다
▲sardine:정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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